“수치심 권하는 사회” 비판 II

2번째 비판.”여성 중심 주의(gynocentrism)”의 책의 90%는 여자만 위해서 쓰여졌다. 통계와 사례, 사례 등이 모두 여성을 위한 여성에 대한 여성의 것이다. 전 책의 뉘앙스는 마치”수치심은 여성의 전유물이다”라고 하는 것 같다. 아, 물론 남성이 느끼는 수치심에 대한 글도 존재한다. 마지막 장 마지막 10쪽 정도가 그렇다. 그것도 “언급”수준이며, 남성이 느끼는 수치심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정도에서 끝내자. 이처럼 여성 중심적(gynocentric)이면 양심적으로 “여성을 위한 “이라는 말을 책의 표지의 어딘가에 적어두어야 하지 않을까?작가는 사회 공동체적 기대에 부합하기 위한 부담으로 거기에 도달 수 없을 때 여성들이 “수치심”을 느낀다고 썼다. 그러나 사회 공동체적 기대와 그것을 만족시키려는 부담감은 남자도 느낀다.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저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런 일을 해야 한다 같은 기대감은 계급, 성별, 직위를 막론하고 모두가 느끼는 부담이다. 상식적이지 않나?자칭”수치심 전문가”라는 작가는 왜 남성의 수치심에 대해서 이렇게 무심할까.(남자가 “제일의 성”으로 사회 구조를 자신의 것인 양 부모 남성적으로 개조했으니)남성이 사회의 기대치에 못 미치지만 수치심을 느낀다고 볼 수 없다는 단순한 페미니스트적 신념 때문일까? (작가는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언급했다.) 아니면 정말 여성이 수치심에 더 취약하기 때문일까?후자라면 저는 불평이 없다. 사실은 신성하니까. 다만 후자가 사실이라면 특정 감정으로부터 선천적으로 취약하기 때문”여성은 보호를 받아야 할 약자”가 되고 만다. 작가는 여성이 피해(수치심)을 받도록 설계된 “사회 구조”를 비판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회 구조가 여성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하려는에 구축되고 있다는 음모론은 사실이 아니다.(인류학적으로 말하면 사회 구조와는 험준한 자연적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서 협력하고 만들어진 역사의 산물이다.)또 작가는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여성과 결합, 결국 여자는 특정 감정으로 보호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다. 의도는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행동은 한쪽 성을 약자로 하고 오히려 성 평등을 인식을 위협한다. 작가는 이런 결과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브렌 브라운 (CMA)

3번째 비판. 아름다움의 음모론 작가들이(여성들의)수치심을 유발하는 원인으로서 가장 자주 언급한 것은 바로”아름다움”이다. 작가는 “아름다움에 대한 고정 관념이 몰래 스며들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마치 그것이 자신의 진짜 생각인 것처럼 믿어 버리는(pp51).”라고 썼다. 그리고 마른 몸을 요구하고 좋아하는 사회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 불평한다.(정말 누구도 이의를 주창하지 않다고? 열등감이 느껴질 정도로 높은 미적 기준을 제시한 광고를 저격하고 제작한 상인 “황금 바비 인형 상(Golden Barbie Award)”은 무엇일까 문제가 있다.저자는 ” 마른 몸매에 대한 추구”과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를 구별하지 않았다. 마른 몸매와 큰 눈 등 몇가지 조건은 확실히 시대가 만들어 낸 기준겠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시공간을 넘어 존재한 보편적인 인간의 본능이다. 뚱뚱한 몸매도 아름답게 인식할 수 있다. 큰 얼굴, 작은 다리, 긴 목도 모두 아름다움의 기준이 될 수 있다. 이런 것은 부분적으로는 문화적 산물인 작가가 비난하는 “사회의 기대”이다. 그렇다고 미를 추구하고 추함을 멀리하며 인간의 욕구를 탓할 도를 넘어섰다.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가 나쁘지? 그리고 도대체 그런 기본적 욕구를 어떻게 없애는가?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로 수치심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돈에 대한 추구라 하더라도 명예에 대한 추구로, 심지어 사랑에 대한 추구로서 온갖 나쁜 감정이 꼽힌다. 그런 욕구는 정상이고 때로는 건강만 있다. 문제는 욕구 자체가 아니라 욕구의 발산 방향이다. 아름다움의 추구는 얼마든지 긍정적으로 발산할 수 있다. 사르트르 대성당이나 잘츠부르크성이 보이는 미라벨 정원을 찾자. 아름다움을 단지의 사악한 것으로 정의할 수 없을 것이다.그 위”미에 대한 욕구”은 작가의 말대로 “모발 업계, 다이어트 업계, 피부 미용 업계, 화장품 업계, 향수 업계”이 만든 것도 아니고 그들이 없는 욕구를 만들어 내는 소비자의 심리를 조작하는 것은 아니다. 황당한 견해이다. 시계공이 시계를 더 팔려고 시간을 발명했다는 것과 아무 차이가 있는가? 아름다움의 조건을 특정하는 주범은 기업일지도 모르지만,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마음은 인간의 본능적 욕구다. 간단히 말하면 욕먹어야 할 정말 있다면, 기업이 아니라 인간의 본능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기대감과 그것을 만족시키지 못한 사람이 느끼는 수치심은 영원히 있으니까. 진실이 사람의 감정에 맞춰야 한다고 전제를 하면 이런 황당한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아름다움에 대한 욕구를 기업이 만드는가? 다르다.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가 나쁘지? 다르다.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 추구는 없애주나? 없앨 수 없다. 그럼 『 수치심 권장 사회 』에서 제시하는 대다수의 예와 논거는 황당한 것인가? 그렇다. 다른 데도 할 말이 많지만 줄이려는. 다른 비판도 결국”너의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불의가 아니다”이란 범주에 들어가는 비판이 있기 때문이다. 만족시키지 못한 때 수치심을 유발할 수도 있다”사회적 기대”이라는 게 항상 멋진 것은 아니다. 그렇다, 때로는 황당하고 때로는 노인 같다. 그러나 모든 기대가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나”는 나에게 무엇이 좋을지 항상 잘 알고 있을까? 특히 저자가 강조하는 청소년들은 자신에게 무엇이 좋은지 부모나 선생님들보다 잘 알고 있는가? “나의 내면의 목소리”는 항상 무훔인가? 저자는 “기분이 만물의 척도”라는 잘못된 뿐 아니라 위험한 사상을 제시하고 무엇이든”자기 맘대로” 살(칸트, 피히테, 키르케고르가 본다면”감찰의 노예”과 혐오하는)사람들을 그렇게 살려고 부추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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