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양업계와 토양지하수 전문인력 양성과정에 대하여…(2)

두 번째 글. 사회 초년생이 되기 전에 사회 경험을 한번 해보자는 마음을 품고 용산사업소를 지원했다. 친척 형네 집에서 신세를 지고 이제 독립해야겠다는 생각에 곧바로 고시원을 차리고 친척 형네 집을 나섰다. 토양 지하수 전문 인력 양성 과정의 마지막은 항상 한 달? 정도의 실습으로 마무리를 하지만 실습할 때 반응은 천차만별이다. 실습업체에 있는 직원이 어떻다는 둥, 뭐 가자마자 회사 대표가 쓴 자서전을 읽고 느낀 점을 업무지시로 내렸다느니(?!), 혹은 아무것도 없이 간단한 복사 등 잡무만 한다느니, 아니면 나처럼 뙤약볕 아래 현장에서 직접 구른다느니. 어쨌든 나는 함께 실습을 받았던 친구들과 틈틈이 연락을 하며 용산사업소 실습을 시작했다. 실습생은 저를 포함해서 2명입니다. 용산사업소에는 낯익은 얼굴이 많았다. 먼저 토양 시료 채취의 실무를 담당한 주임, 그리고 대리. 안면이 있었기 때문에 익숙해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사무실에는 직원 2명이 더 있었고 차장과 과장이었다. 차장의 경우 연륜이 있는 직원 분이었고 매사에 침착하게 행동하는 편이었다. 과장의 경우 대단한 능력자였지만 시료채취 사업이 끝날 무렵 최연소 차장으로 진급됐다. 이때 들려오는 말 때문에 다른 지사 선배들이 질투가 심했다고. 본인이 잘하고 진급했는데 왜 그렇게 질투하는지 잘 모르겠더라. 그때는 연공서열이 있다는 건 알지만 그렇게 심하다는 건 못 느꼈기 때문이다. 분명 나는 일용직 신분으로 온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그런 농어촌공사의 자세한 조직문화를 몰랐을 것이다. 하긴 일용직이라 그런 대우를 받은 적도 있고, 업무도 단순하다 보니 욕먹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나의 첫 사회생활은 정말 순조로웠어. 단순한 이해관계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사무실에서 인사를 마친 뒤 용산역 옆 철도부지 현장으로 출발한다. 용산 현장은 정말 넓다. 두 번째 글. 사회 초년생이 되기 전에 사회 경험을 한 번 해보자는 마음을 품고 용산사업소를 지원했다. 친척 형네 집에서 신세를 지고 이제 독립해야겠다는 생각에 곧바로 고시원을 차리고 친척 형네 집을 나섰다. 토양 지하수 전문 인력 양성 과정의 마지막은 항상 한 달? 정도의 실습으로 마무리를 하지만 실습할 때 반응은 천차만별이다. 실습업체에 있는 직원이 어떻다는 둥, 뭐 가자마자 회사 대표가 쓴 자서전을 읽고 느낀 점을 업무지시로 내렸다느니(?!), 혹은 아무것도 없이 간단한 복사 등 잡무만 한다느니, 아니면 나처럼 뙤약볕 아래 현장에서 직접 구른다느니. 어쨌든 나는 함께 실습을 받았던 친구들과 틈틈이 연락을 하며 용산사업소 실습을 시작했다. 실습생은 저를 포함해서 2명입니다. 용산사업소에는 낯익은 얼굴이 많았다. 먼저 토양 시료 채취의 실무를 담당한 주임, 그리고 대리. 안면이 있었기 때문에 익숙해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사무실에는 직원 2명이 더 있었고 차장과 과장이었다. 차장의 경우 연륜이 있는 직원 분이었고 매사에 침착하게 행동하는 편이었다. 과장의 경우 대단한 능력자였지만 시료채취 사업이 끝날 무렵 최연소 차장으로 진급됐다. 이때 들려오는 말 때문에 다른 지사 선배들이 질투가 심했다고. 본인이 잘하고 진급했는데 왜 그렇게 질투하는지 잘 모르겠더라. 그때는 연공서열이 있다는 건 알지만 그렇게 심하다는 건 못 느꼈기 때문이다. 분명 나는 일용직 신분으로 온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그런 농어촌공사의 자세한 조직문화를 몰랐을 것이다. 하긴 일용직이라 그런 대우를 받은 적도 있고, 업무도 단순하다 보니 욕먹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나의 첫 사회생활은 정말 순조로웠어. 단순한 이해관계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사무실에서 인사를 마친 뒤 용산역 옆 철도부지 현장으로 출발한다. 용산 현장은 정말 넓다.

용산철도사업소 부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로 56 수도권철도차량관리단 용산철도사업소 부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로 56 수도권철도차량관리단

이곳은 예전에 철도차량관리단이 있던 곳이다. 우리는 이 부지를 철도 사업소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안에는 옛날 우체국 집하장이 있었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정말 오래된 우체국 건물이 남아 있었다. 어쨌든 우리는 이 중에서 실습 기간 동안 배정된 업무를 진행하기로 했다. 우리의 일은 시료 채취 지점에 말뚝을 박는 것이었다. GPS를 이용해 좌표를 확인하고 오차범위를 최소화해 최대한 정확한 지점에 말뚝을 박아야 했다. 말뚝에는 색깔을 알 수 있도록 빨간색, 흰색, 노란색 깃발이 걸려 있다. 이 빨간색, 흰색, 노란색 깃발은 매우 중요한 표시였는데, 해당 부지는 행정규칙에 근거한 토양정화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절차인 기초조사, 개황조사, 정밀조사에 필요한 시료채취 지점을 구분하기 위한 색이었다. 우리가 말뚝을 박은 것은 아마도 기초 조사의 마지막 단계였을 것이다. 이곳은 예전에 철도차량관리단이 있던 곳이다. 우리는 이 부지를 철도 사업소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안에는 옛날 우체국 집하장이 있었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정말 오래된 우체국 건물이 남아 있었다. 어쨌든 우리는 이 중에서 실습 기간 동안 배정된 업무를 진행하기로 했다. 우리의 일은 시료 채취 지점에 말뚝을 박는 것이었다. GPS를 이용해 좌표를 확인하고 오차범위를 최소화해 최대한 정확한 지점에 말뚝을 박아야 했다. 말뚝에는 색깔을 알 수 있도록 빨간색, 흰색, 노란색 깃발이 걸려 있다. 이 빨간색, 흰색, 노란색 깃발은 매우 중요한 표시였는데, 해당 부지는 행정규칙에 근거한 토양정화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절차인 기초조사, 개황조사, 정밀조사에 필요한 시료채취 지점을 구분하기 위한 색이었다. 우리가 말뚝을 박은 것은 아마도 기초 조사의 마지막 단계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정말 힘들었던 게 한여름이라 해가 중천에 뜰 때쯤이면 정말 몸이 녹을 것 같았다. 수풀은 무릎 높이까지 자라서 빠지기 어려우며, 어떤 곳은 갈대가 우거져 낫으로 베어도 끝이 없었다. 그럼에도 주임님과 대리님은 우리의 체력 안배를 위해 틈틈이 사무실에 들어와 땀도 식히고, 하루는 고생했다고 칭찬하며 집에 일찍 데려다 주기도 했다. 우리는 주로 용산역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어. 메뉴는 정해져 있었어. 김치찌개에 라면면, 설렁탕, 양념돼지불고기 혹은 용산역 내 쇼핑몰에 있는 식당. 앞의 세 가지 요리는 정말 너무 맛있었어. 힘들게 먹어서 그런지 더 맛있었던 것일까. 나는 이 중에서 양념돼지 불고기의 맛을 아직도 잊을 수 없어. 식당 안에서 땀냄새를 풍기며 먹었던 그 고기의 맛은 정말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그 가게의 위치는 아직 정확히 기억하고 있어. 그 가게로 가는 길에는 낡은 반지하 헌책방이 있었다. 그 헌책방에서는 오래된 책 냄새가 풍겨 왔다. 간판도 입구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곳 주인은 아침마다 책을 꺼내 이곳이 서점임을 알린다. 어쨌든 그 불고기 식당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나를 다시 용산역에 데려다 놓으면 잘 찾을 자신이 있다. 다시 용산역에 갈 일이 있다면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 싶다. 아직 남아있는지 모르겠어. 식당의 시어머니는 가스버너에 불을 붙이고 철판 위에 포일을 깔고 그 위에 양념한 돼지고기를 올려준다. 주임이 그 옆에서 농담을 하고 있다. “아지매요, 3인분 같은 2인분 주세요~” 옆에 있던 과장도 맞장구를 치며 “그래~ 여기 이 젊은 두 친구 안 그래도 고생하는데 밥을 많이 먹여야지~” 식당 어머니는 인정 있는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고기 몇 점을 얹어 구워주곤 했다. 젊음 특유의 패기만 가지고 서울에 와서 어머니가 해주시는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없었지만, 이런 식당들은 나의 그런 그리움을 충분히 채워주곤 했다. 서울에 있는 동안 그렇게 큰 외로움은 느끼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게 신기하고, 재밌고, 즐거울 뿐이었다. 한 가닥까지도 말이다. 일과가 끝나면 힘든 현장직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늘 조깅을 하며 서울 곳곳을 누볐다. 나는 항상 운동을 할 때 꼭 신경 쓰는 것이 있어. 꼭 턱걸이 운동은 해야 한다는 거야. 그래서 철봉이 있는 공원을 항상 찾아야 한다. 그리고 가는 길에 노래방도 있어야 해. 그래야 내 취미생활도 할 수 있어. 마침 허름한 내 고시방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숙명여대가 있었다. 이곳 주변에는 공원도 있었고, 게다가 작은 대학로도 있어서 노래방도 충분히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주말에는 항상 나에게 주는 작은 행복으로 치킨을 한 마리씩 사 먹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살아도 마냥 즐거웠다. 뭐든지 배우는 것 같으니까. 어쨌든 실습 기간에는 낮에는 매일 말뚝을 박고 퇴근 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일상을 반복했다. 가끔 용산역 드래곤스파에 가곤 했어. 그런데 이때 정말 힘들었던 게 한여름이라 해가 중천에 뜰 때쯤이면 정말 몸이 녹을 것 같았다. 수풀은 무릎 높이까지 자라서 빠지기 어려우며, 어떤 곳은 갈대가 우거져 낫으로 베어도 끝이 없었다. 그럼에도 주임님과 대리님은 우리의 체력 안배를 위해 틈틈이 사무실에 들어와 땀도 식히고, 하루는 고생했다고 칭찬하며 집에 일찍 데려다 주기도 했다. 우리는 주로 용산역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어. 메뉴는 정해져 있었어. 김치찌개에 라면면, 설렁탕, 양념돼지불고기 혹은 용산역 내 쇼핑몰에 있는 식당. 앞의 세 가지 요리는 정말 너무 맛있었어. 힘들게 먹어서 그런지 더 맛있었던 것일까. 나는 이 중에서 양념돼지 불고기의 맛을 아직도 잊을 수 없어. 식당 안에서 땀냄새를 풍기며 먹었던 그 고기의 맛은 정말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그 가게의 위치는 아직 정확히 기억하고 있어. 그 가게로 가는 길에는 낡은 반지하 헌책방이 있었다. 그 헌책방에서는 오래된 책 냄새가 풍겨 왔다. 간판도 입구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곳 주인은 아침마다 책을 꺼내 이곳이 서점임을 알린다. 어쨌든 그 불고기 식당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나를 다시 용산역에 데려다 놓으면 잘 찾을 자신이 있다. 다시 용산역에 갈 일이 있다면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 싶다. 아직 남아있는지 모르겠어. 식당의 시어머니는 가스버너에 불을 붙이고 철판 위에 포일을 깔고 그 위에 양념한 돼지고기를 올려준다. 주임이 그 옆에서 농담을 하고 있다. “아지매요, 3인분 같은 2인분 주세요~” 옆에 있던 과장도 맞장구를 치며 “그래~ 여기 이 젊은 두 친구 안 그래도 고생하는데 밥을 많이 먹여야지~” 식당 어머니는 인정 있는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고기 몇 점을 얹어 구워주곤 했다. 젊음 특유의 패기만 가지고 서울에 와서 어머니가 해주시는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없었지만, 이런 식당들은 나의 그런 그리움을 충분히 채워주곤 했다. 서울에 있는 동안 그렇게 큰 외로움은 느끼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게 신기하고, 재밌고, 즐거울 뿐이었다. 한 가닥까지도 말이다. 일과가 끝나면 힘든 현장직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늘 조깅을 하며 서울 곳곳을 누볐다. 나는 항상 운동을 할 때 꼭 신경 쓰는 것이 있어. 꼭 턱걸이 운동은 해야 한다는 거야. 그래서 철봉이 있는 공원을 항상 찾아야 한다. 그리고 가는 길에 노래방도 있어야 해. 그래야 내 취미생활도 할 수 있어. 마침 허름한 내 고시방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숙명여대가 있었다. 이곳 주변에는 공원도 있었고, 게다가 작은 대학로도 있어서 노래방도 충분히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주말에는 항상 나에게 주는 작은 행복으로 치킨을 한 마리씩 사 먹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살아도 마냥 즐거웠다. 뭐든지 배우는 것 같으니까. 어쨌든 실습 기간에는 낮에는 매일 말뚝을 박고 퇴근 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일상을 반복했다. 가끔 용산역 드래곤스파에 가곤 했어.

드래곤힐스파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대로21나길 40 예약 드래곤힐스파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대로21나길 40 예약

용산역 인근 상가에는 이 드래곤스파 입장 인권을 얻을 수 있는 곳이 많았다. 용산 이마트만 해도 계산할 때 식사처럼 가져갈 수 있었다. 그래서 이 고퀄리티 찜질방에 자주 가서 피로를 풀 수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토양지하수 전문인력 양성과정 얘기는 없이 내 넋두리만 하고 있다. 사실 나도 실습기간에는 했던 일이 딱히 생각나지 않아서 그냥 생각나는 대로 쓰고 있어. 이게 벌써 몇 년 전 일이니까. 그래서 다음 글에는 본격적으로 교육이 끝나고 여기서 일용직으로 일하기 시작하는 것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한다. 이때는 교육생 신분이어서 특별할 게 없었다. 대개 단순 업무로 끝났기 때문이다. 용산역 인근 상가에는 이 드래곤스파 입장 인권을 얻을 수 있는 곳이 많았다. 용산 이마트만 해도 계산할 때 식사처럼 가져갈 수 있었다. 그래서 이 고퀄리티 찜질방에 자주 가서 피로를 풀 수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토양지하수 전문인력 양성과정 얘기는 없이 내 넋두리만 하고 있다. 사실 나도 실습기간에는 했던 일이 딱히 생각나지 않아서 그냥 생각나는 대로 쓰고 있어. 이게 벌써 몇 년 전 일이니까. 그래서 다음 글에는 본격적으로 교육이 끝나고 여기서 일용직으로 일하기 시작하는 것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한다. 이때는 교육생 신분이어서 특별할 게 없었다. 대개 단순 업무로 끝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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